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마사아키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파일:external/sharp78.com/14L07_1.jpg]] 야구는 중학생 때부터 시작하여 원래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고교 시절 2학년에 포수로 전향했고 3학년 때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대회에 출전했으나, 첫 경기에서 타구를 가랑이에 맞고 기절하여 경기 도중에 그라운드를 떠났다. 도쿄6대학에서의 플레이를 꿈꾸며 릿쿄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었으나 집안 사정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계약금 50만엔에 요미우리에 입단하였다. 월급 3만 중 일부를 어머니께 계속 송금했으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자세도 이 무렵에 양성되었을지도 모른다. 두 명의 동기생 포수와 함께 입단했으며 그 중 한 명인 가토는 주쿄고등학교[* [[아이치현]]의 야구명문교로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에 많이 출전하고 있으며 프로야구선수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를 그 해 여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모리를 포함한 3명의 신인 포수는 경쟁을 벌였다. 입단 후 5년간 무명의 세월을 보냈다. 에이스 투수들은 경기가 없는 날 숙소로 찾아와 2군 포수를 앉혀놓고 투구 연습을 실시 했는데 에이스 투수 [[벳쇼 다케히코]]가 "너 받아!" 라고 하면 다리 밑으로 같이 이동하여 벳쇼의 피칭을 받는 등 맹렬한 연습을 했다. 모리는 '프로라는 곳이 이런 곳'임을 이 때 깨달았다고 한다. [[후지모토 히데오]]가 폭스바겐 차를 끌고 오는 모습에 눈부심을 느꼈으며 이것이 과연 거인의 대스타의 모습임을 알았다. 프로 초년병 시절 모리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경기를 마친 후 [[스이도바시역]]에서 국철을 탑승, [[요요기역]]에서 환승하여 [[시부야역]]에서 [[도큐 도요코선]]으로 다시 환승한 뒤 [[타마가와역(도쿄)|타마가와역]]에 내려서 역 앞의 [[슈퍼마켓]]에서 100엔짜리 [[비엔나소시지]]를 사서 기숙사[* 당시 팀의 연습구장 및 기숙사는 타마가와에 있었으며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을 신축하면서 이전했다. 2021년 현재는 [[코라쿠엔역]]에서 [[도큐 메구로선]]에 직통하는 [[도쿄메트로 난보쿠선]]을 타고 타마가와로 바로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난보쿠선 개통 이전이었다.]로 돌아와서는 식은 [[쌀밥]]에 [[된장국]], 소시지를 [[반찬]]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 1군에는 은퇴를 앞둔 히로다와 호타, 준족, 강견의 후지오 시게루가 있었다. 입단 동기들, 1군 레귤러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수비력 향상만이 우선임을 알게된 후 투수리드, 볼배합, 블로킹, 캐칭, 도루저지 등을 가다듬는데 집중했다. [[미즈하라 시게루]],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후지오를 중견수로 밀어내고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했다. 우수한 [[통찰력]], 빠른 두뇌회전, 늘 연구에 노력하는 자세, 상대 타자의 약점과 상대팀 배터리의 볼배합을 모조리 기억하는 암기력 등 우수한 기량을 갖춘 당대 최고의 포수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캐칭 기술도 좋아서 폭투 내지 패스트볼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고, 이러한 모습으로 그의 표면적인 성적에 비해 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막대하여 선수 시절에 이미 '''"V9의 두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또한 강견을 바탕으로 높은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며 도루를 시도하는 상대 팀 주자는 전부 죽는다(잡힌다)는 의미에서 '''"몰살의 모리"'''라는 별명도 있었다. 부상에도 강해 좀처럼 결장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카와카미 감독은 그를 안주시키지 않기 위해 계속 아마추어계에서 우수한 포수들을 영입하였고, 모리는 카와카미 감독의 그러한 행태에 대해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라고 생각 했지만 영입된 새로운 경쟁 포수들에게 절대 뒤쳐지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불패의 감독학>이라는 책에서는 모리 때문에 날린 요미우리가 영입한 포수들 계약금과 연봉이 못해도 10억엔은 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모리에게 밀린 포수는 24명, 그들의 계약금을 합하면 5억엔이라고 한다.] [[일본 시리즈]]에서 상대할 [[퍼시픽리그]]의 전력을 분석하기 위해 [[난카이 호크스]]의 라이벌 포수 [[노무라 카츠야]] 집에 방문하기도 했다. [* 이 때의 에피소드로 노무라의 집에 다녀올 때마다 노무라의 옷을 꼭 한 두 벌씩 들고 왔다고 한다. 이 둘은 1992, 1993년 세이부와 야쿠르트의 감독으로서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한다. 전적은 1승1패로 동률.(세이부는 '92년, 야쿠르트는 '93년 우승)]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한 날이면 모리는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고 노무라가 어딨는지를 주위에 묻고, 노무라를 만나기 위해 귀경하고는 했다. 리그 우승의 순간 퍼시픽리그 우승팀의 정보 분석이 바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리의 성실한 자세를 높이 삼아 1967년 일본시리즈[*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이끄는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매치업이었으며 4승 2패로 교진이 승리하면서 3연패를 달성했다.]에서 모리가 MVP로 선정됐을 때 가와카미 감독은 누구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모리는 투수의 컨디션이 나쁘면 즉시 감독과 코치에 보고했다. 투수가 안타나 실점을 허용했을 때 책임을 절대 자신의 탓으로 하지 않고 전적으로 투수에게 돌렸다. 모리가 주전 포수가 되고 나서 투수들이 벤치에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코치가 폭로한 적이 있는데, 모리가 저런 보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 감독은 그런 모리의 비정한 보고가 승부처에서 도움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동료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는 이런 모리의 모습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이는 모리가 마치 책임회피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동갑인 모리와 나가시마는 현역 시절에 서로 격려의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을만큼 불화가 있었다. 이 때 같이 호흡을 맞춘 투수로 [[가네다 마사이치]], [[후지타 모토시]]등이 있다. 1963년은 그에게 참 힘든 시즌이었다. 132경기에서 마스크를 쓰면서 타율은 .198, 홈런은 단 4개를 기록했다.[* 1963년 정규시즌에서 나가시마는 타율(.341), 타점(112), 최다안타(163) 등 3개 부문 1위였으며, 오 사다하루는 홈런(40), 득점(111) 등 2개 부문 1위였다. 같은 해 퍼시픽리그에서는 [[노무라 카츠야]]가 52홈런, 135타점, 104득점을 기록하여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니시테츠 라이온즈]]와의 일본시리즈 3차전 도중, [[고라쿠엔 구장]]의 백스톱에서 어느 팬이 파울타구를 그라운드로 돌려주려다가 가족과 함께 경기를 관람중이던 3세 소녀의 후두부를 직격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는데, 경기가 끝나고 이를 안 모리가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간호한 바람이 있어 다행히 큰 일까지는 가지 않은 적이 있다.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는 니시테츠 타자의 파울타구에 맞아 팔뼈 염좌 진단을 받았으며, 일본시리즈 직전에 탄생한 장남이 감기로 생후 100일 남짓으로 생을 마감했다.[* 팀은 1963년 일본시리즈에서 [[니시테츠 라이온즈]]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7차전은 요미우리의 18-4 대승.] 모리는 낙담했지만 이러한 일들이 큰 영향을 주어 '나는 보리 같은 것. 밟혀도 밟혀도 일어나겠어'라는 말버릇대로 야구에 몰두해 주전 포수의 아성을 공고히 했다. 만년 8번타자였던 모리는 어느덧 ON포의 뒤를 잇는 5번 타자로 급부상하여 타선의 핵심이 됐다. 1966년에는 --새카만 후배 주제에 건방졌던-- 신인 투수 [[호리우치 츠네오]]의 개막 13연승을 어시스트했다. 이 때 호리우치 츠네오는 긴장을 푼답시고 백스톱에 공을 던지는 등 모리를 아연실색케 한 일화가 있다. 이 해에는 도쿄 6대학리그에서 타격 3관왕을 차지한 거물신인 오하시가 입단했고 다들 모리는 이제 끝이라고 여겼지만 모리는 그 이후에도 무려 8시즌을 더 주전으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타율은 높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필요할 때 한방을 쳐 주는 클러치 능력이 뛰어났다. 같은 시기 1루수 [[오 사다하루]],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팀의 [[일본 시리즈]] 9연패에 기여했다. OH포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뛰어난 포수 능력으로 '''"그늘의 MVP"'''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V9 시절 모든 일본시리즈를 출장한 선수는 오 사다하루와 모리 마사아키 둘 뿐이다.][[센트럴 리그]] - 일본 시리즈 10연패 달성에 실패한 1974년 시즌[* 이 해 [[요나미네 카나메]]가 감독으로 있던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센트럴 리그 우승을 허용하며 요미우리는 일본 시리즈 진출 자체에 실패했다. 일본시리즈 우승의 영광은 [[치바 롯데 마린스|롯데 오리온스]]가 차지했다.]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나가시마 시게오도 모리와 같은 해에 은퇴했다.[* 은퇴시합도 같은 날에 치뤘는데 본인은 8번타자 포수로 선발출장했다. 은퇴시합당시 타순은 시바타 이사오(중견수)-다카다 시게루(좌익수)-왕전즈(1루수)-나가시마 시게오(3루수)-쓰에츠구 도씨미쓰(우익수)-쿠로에 노부유키(유격수)-도이 쇼조(2루수)-모리 마사아키(포수)-다카하시 요시마사(투수).] V9 시절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평하기를, 당시의 거인은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이었으며 파벌이나 그룹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선수의 자존심도 높아 평소에는 선수 각자 자신의 포지션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지만 게임에 들어가면 똘똘 뭉쳤다. 이렇게 팀을 유지하는 고삐를 쥔 것은 가와카미 감독이었으며, 모리가 현역 시절에는 말도 못 붙일만큼 어려웠지만 감독과 포수 관계로 변화하고 나서는 태연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선수 모두 부상에 강했으며, 오 사다하루나 나가시마 시게오조차 부상을 당해도 표를 내지 않았다. 모리는 본인이 골절, 탈구 등의 부상을 입어 공 1개를 받을때마다 머리까지 아픔이 전해져 왔지만 시즌 종료까지 마스크를 쓰고 계속 플레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